우울적 양태는 생후 3개월경 좀 더 강하게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생후 7개월에서 1년 사이에 우세하게 자리 잡는다(Klein, 1935).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의미이다. 편집-분열성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특히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는 이런 요소로 되돌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충분히 순조롭게 돌아가는 때가 되어야만 아기는 편집-분열성의 최악의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생존을 좀 더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아기는 박해 불안에서 자신을 막아 주던 분열과 부인, 투사적 방어를 해야 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면서 다른 근심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우울적 양태라 하고, 여기에는 일련의 우울한 불안이 수반된다.
우울적 양태의 아기는 지각을 왜곡할 필요성을 덜 느끼기 때문에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경험한다. 아기는 자신의 분열에서 비롯된 부분 대상, 즉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아버지 그리고 자기가 복잡하고 온전한 사람이며, 자기는 이들에게 혼합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의 초기 단계는 특별한 불안을 유발한다. 즉, 내적 대상과 외적 대상이 점점 더 통합되면서 아기는 부재를 단순히 어떤 나쁜 것에 의해 공격당해 빼앗기는 것이기보다 좋은 것을 상실하는 것으로 경험한다. 이에 대한 아기의 반응은 분노가 아닌 슬픔이다. 아기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하는 것은 약 3개월 경이다. 아마도 이것은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졌음을 표현하는 것인지 모른다.
분열이 줄어들면서 서로 다른 경험이 좀 더 잘 맞아떨어진다. 나쁜 것이 덜 나쁘고,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도 덜 좋다. 잃어버린 에덴동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신화는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애도를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실재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상실한 더없는 기쁨과 순수함에 대한 감각을 남겨 둔다. 그런 경험이 사태의 전부라고 보기에는 우리가 아는 게 너무 많아져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때 그렇게 보았다.
세상의 선함이 더럽혀지게 되면서 아기의 선함 또한 그렇게 된다. 아기는 자신이 파괴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그 악한들이 바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는다. 이런 깨달음은 아기가 자신의 분노에 대해 겁먹게 만들며, 이것이 바로 우울적 양태의 중심을 이루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롯 두렵기는 하지만, 완전한 절멸에 대한 편집-분열성적 두려움보다는 다소 덜 심각한 재앙이다. 하지만 아기는 주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위협 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생존이 위험하다고 느낀다. 내면화된 좋은 대상(사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아기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없다면 아기는 자신이 전적으로 나쁘고 가치 없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노에 대한 아기의 두려움은 초자아와 죄책감 그리고 회한의 감정의 주된 부분을 이루는데, 이런 감정은 우울적 양태에서 감정적 차원의 어려움을 추가적으로 야기한다. 아기는 자신의 분노를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대신 분노를 내부로 향하게 하고 이기적이고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질책한다. 이것이 우울의 핵심이고, 그래서 ‘우울적 양태’라는 용어가 나오게 됐다. 우울한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우울에 의해 무력화되기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즉, 한편으로는 분노와 욕구로 인해 행동과 관계와 외부 세계로 향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모호한 원망과 죄책감과 불만족에 빠진다. Melanie Klein은 생후 1년이 끝나는 시점에 접어들 때 아기에게 슬픔의 표현과 이따금씩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Klein, 1959). 아기는 이제 내적 갈등과 낮은 자존감, 슬픔과 죄책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죄책감의 고통은 새로운 복구(reparation) 능력의 근원이 된다. 아기는 비록 분노가 손상을 줄 수 있지만 사랑이 손상을 복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울의 수렁에 빠져 꼼짝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를 막아 주는 것은 복구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복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속적인 위험으로 느껴진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분노가 너무 압도적이거나 파괴적이어서 복구가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들은 복구의 기초가 되는 자기 자신의 선함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거나 혹은 실제로 한 번도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의 죄책감 자체가 너무 박해적이고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만약 이전의 편집-분열성적 불안이 단지 일부만 해소되고 삶에 대한 박해적 특성이 계속되며 그 결과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으로 억압하고 편집-분열성적 방어기제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이런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이 특히 높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박해와 상실, 죄책감, 복구의 경험을 반복해서 겪어 내는 것을 본다. 막무가내로 고집부리고 화내고 갈등을 일으키는 행동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욕구와 부모에게 뭔가를 주고자 하는 절박한 욕구는 번갈아 나타난다. 이들이 주는 것은 새벽 5시에 부모를 깨워 마시라고 건네주는 차가운 ‘차’ [진짜 차가 아닌 아이들이 티타임 놀이에서 만드는 차-역주] 한 잔 이거나,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내미는 때 묻은 과자 조각이다. 아이의 부모는 반드시 그 이유를 알고 있어서는 아니지만 이런 선물을 거절하는 행위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아이의 감각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초기 형태의 복구는 도움 주기, 개인적 흥미와 재능, 사회에 기여하는 모든 방식으로 발전해 간다. 따라서 복구 능력은 Klein이 건설적인 삶과 창조적 힘의 근원으로 보았던 감정적 차원의 핵심적인 성취다.
Klein은 우울을 동반하는 불안이 위기에 달하게 되고 이것이 이유(離乳) 경험에서 상징화될 수 있다고 시사하는데, 이는 대상관계이론의 문화적 특수성을 보여 준다. 서구 사회에서 이유는 흔히 생후 1년 무렵에 이루어지는데, 이 무렵 아기는 상실과 분노, 슬픔의 경험을 겪어 내고 이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하고 자기와 타인에 대한 인식도 향상될 수 있다. 만약 아기가 이런 준비가 되기 전에 이유가 이루어지면 엄마 젖이나 우유병의 상실은 그저 뭔가를 박탈하는 공격이 될 수 있고, 불안전감과 함께 세상은 적대적이라는 느낌을 강화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영역에서 상실과 분리한 타협할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면 아기는 자신의 파괴력의 한계와 복구하는 사랑의 힘에 대하여 안전감을 주는 지식을 발달시키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이루어지는 이유는 서구 사회에서 분리와 독립을 엄청나게 강조하는 경향의 한 부분일 수 있고, 이런 경향은 또한 우울적 양태에 부여된 중요성에서도 반영된다.
우울적 양태의 출현으로 아이의 오이디푸스 딜레마는 처음에는 악화된다(Klein, 1945). 이 무렵 아기는 이전처럼 부모의 분열된 부분 대상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강력한 혼합된 부모상을 시기하는 대신,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또 자신에게 필요한 엄마와 아버지가 자신이 제외된 어떤 관계를 하는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아기의 갈등하는 감정은 죄책감과 자신의 파괴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더 힘겹게 되는데, 이것이 아이가 내면화된 내적 부모와 외부의 부모를 모두 보호하기를 소망하면서 사랑하는 감정을 재발견하도록 자극한다. 드물게 낙관적인 순간에 Klein은 Freud가 믿었던 것처럼 아이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부모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때문에도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가 행복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한다. 자신의 질투심을 극복하려고 애쓰면서 아이는 자기 내면에 선함이 있음을 알고 안심한다. 그의 내면화된 부모는 위험하거나 나쁘지 않고 안전하고 좋게 느껴지고 부모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든다. 충족감을 주는 결합된 부모상의 형태는 4세 된 남아 스테판의 신나는 꿈 ‘바퀴에 실린 500개의 아이스크림’에서 상징화된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아이의 오이디푸스 갈등은 좀 더 큰 안전함, 자신과 부모 및 세상에 대한 신뢰의 형태로 해소된다.
편집-분열성 양태와 우울적 양태는 각 양태에 수반되는 주제나 불안과 함께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그 균형이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각기 다른 시접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좀 더 안전하게 느끼거나 덜 안전하게 느끼고, 혹은 사태를 좀 더 혹은 덜 명확하게 보거나, 좀 더 용기를 갖고 문제에 직면하거나 용기를 적게 내어 문제를 피해 숨기도 한다.
후기 Klein 학파 이론가들은 흔히 ‘경계선’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고정된 패턴에 대해 설명했는데, 경계선 상태에서는 편집-분열성적 방어기제가 시종일관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상태에서는 정신병적 분열성증이나 정신분열증적 상태에서처럼 현실이 부인되지도 않고, 우울적 양태에서처럼 현실이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지각이 이상해지거나 왜곡되고, 그 결과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상실과 죄책감이 따르는 우울적 양태의 좀 더 나은 통합으로 나아가기보다 좀 더 익숙하고 덜 힘든 분열성증적 두려움과 분열성적 방어로 후퇴하여 달아난다. Steiner(1993)는 이런 상태를 성격의 ‘병리적 조직화(a pathological organization)’라 부른다. 그리고 Rosenfeld(1971)는 이것을 마피아 같은 ‘자기애에 빠진 패거리(a Mafia-like narcissistic gang)’가 죽음 본능의 지배를 받는 내면의 음모로 마음을 통제하는 것에 비유한다. 이런 환자나 내담자와 치료적으로 작업하는 치료자는 심하게 낙담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좀 더 나은 통합에 대한 이들의 두려움이 극심하고, 또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 이들에게 저항하기 힘든 정도의 변태적인 흥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렬한 시기심 때문에 이들은 치료자가 제공하는 유익한 반응을 특히 감당하기 어렵다. 치료자의 유익한 반응은 치료자가 환자의 불행을 고소해하거나 선심 쓰는 듯하거나 냉담하거나 혹은 환자에게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면 치료자는 역전이에 말려들어, 관찰하고 주시하기보다 격노와 무력감에 굴복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치료적 관계를 죽이지 않고 살려 놓는 일이 이런 환자를 오랜 기간 치료해서 성취할 수 있는 전부일 수도 있다.
Klein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심리치료와 상담은 우울한 존재 양식을 좀 더 안전하게 확립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좀 더 안전하게’라고 한 것은 이것이 결코 완전히 안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해받는 상황뿐만 아니라 상실하고 실망한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라는 믿음으로 다소 쉽게 되돌아간다. 이런 상태에서는 연민의 정과 공감이 줄어들고 비난이 커진다. 또한 우리 자신의 경험이 우리의 정신적 공간을 모두 채우면서 다른 사람의 경험은 덜 중요해진다. 좀 더 안전하고 균형 잡힌 인간다움으로 가는 길은 우리의 평범함과 부족함을 인식하고 수용하면서도 혐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겸허함은 우울적 양태가 갖는 핵심적 특징이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상관계이론 입문(편집-분열성 양태) - 저자 Lavinia Gomez (3) | 2025.08.26 |
---|---|
대상관계이론 입문(클라인의 이론) - 저자 Lavinia Gomez (2) | 2025.08.25 |
대상관계이론 입문(클라인의 생애) - 저자 Lavinia Gomez (3) | 2025.08.24 |
대상관계이론 입문(프로이트의 이론 / 마음에 대한 지형학적 구분, 꿈과 증상) - 저자 Lavinia Gomez (1) | 2025.08.23 |
대상관계이론 입문(프로이트의 이론 / 마음의 구조, 본능) - 저자 Lavinia Gomez (3) | 2025.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