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anie Klein은 정신분석 분야에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상실과 혼란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자신의 전문 분야, 즉 유아기의 초기 몇 개월과 그 시기와 관련된 정신병적 불안에 대해 그녀가 그리는 암울한 그림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Freud보다 한 세대 뒤인 1882년 오스트리아에서 Melanie Reizes로 폴란드계 헝가리 유대인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상점을 운영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반유대주의 정서로 말미암아 경력이 단절되었고 주로 치과의사로 일해야 했다. Klein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그녀의 출생이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언니 Emilie를 더 좋아하고 어머니는 오빠 Emanuel을 끔찍이 사랑한 데 대해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또 다른 언니 Sidonie는 8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Klein이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상실의 시작이었다.
Klein의 가족은 Phyllis Grosskurth가 그녀에 대해 쓴 포괄적인 전기(Grosskurth, 1986)에서 서로 얽혀 있고 신경증적인 가족으로 그려져 있다. 이 가족은 Klein의 어머니 Libussa라는 강력한 인물을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그녀는 사람을 조종하는 전문가였고, 감정적인 면에서 또 실제적인 면에서 중심점을 제공했다. 돈을 관리하고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 사람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Klein은 언니 Emilie와 아버지 Moritz가 연합한 약한 2인방에 맞서 어머니와 오빠 Emanuel이 연합한 위세 높은 집단과 한편이 되어 강력한 3인방을 구성했다. Klein은 어머니는 사랑과 헌신의 상징으로 이상화했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오빠를 숭배하게 됐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꼈던 아버지와는 달리, 오빠는 그녀의 명석함을 알아보고 그녀가 학문을 계속하도록 격려해 줬던 대리 아버지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결핵 진단을 받고 나서 자멸적인 떠돌이가 되어 죽어 가는 예술가처럼 이곳저곳을 여행했는데, 어머니에게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심리적 부담을 안겼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는 Klein을 압박해서 자신을 위해 가족에게서 더 많은 돈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는 1902년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Klein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실 가운데 하나였다.
Klein의 아버지는 이보다 앞서 2년 전에 사망했고,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녀가 의학을 공부하려던 계획은 포기했던 이유였음을 그녀는 나중에 언뜻 내비쳤다. 그녀는 또한 오빠의 죽음 이후에 그녀에게 쏟아진, 그녀의 검고 빼어난 미모를 숭배한 젊은 남성들의 관심으로 우쭐해지고 위안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화공기술자인 Arthur Klein과 1903년에 결혼했다.
그 결혼은 결코 성공적이지 않았는데, Arthur의 잦은 여행은 그들이 결혼생활 초기 몇 해 동안 서로를 보는 일이 매우 드물었음을 뜻했다. 그러나 Klein은 남편의 여형제인 Jolande를 특히 좋아하게 됐고 다른 시댁 친지도 좋아하게 됐다. 1904년과 1914년 사이에 이 부부는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Klein은 자신의 새로운 삶이 힘겹고 기쁨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는 엄마로서의 역할과 아이에 대한 관심 속으로 최대한 나 자신을 내던졌다.”라고 딸 Melitta의 출생 후 시기를 서술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지만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썼다(Grosskurth,1986: 42). 그녀는 깊은 우울에 빠졌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이들이 아주 어렸던 시기에 그녀가 휴가를 하고 ‘치유’ 받도록 자주 여러 곳으로 보냈다. 아마도 산후 우울증이 전반적으로 저조한 그녀의 상태를 악화시켰을 것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당연히 그녀의 자리를 대신 지키면서, Klein이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래 집을 떠나 있도록 자주 종용했다.
길을 잃고 겁에 질려 있는, 어머니와 삶의 방향성 없이 삶을 꾸려 나갈 수 없었던 한 여성을 우리는 그려 볼 수 있다. 나중에 그녀가 분출시켰던 상상력과 지적인 힘은 당시 그녀를 무력하게 만든 우울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1914년 Libussa가 죽었는데, Klein이 정신분석을 발견한 때는 바로 이 위기의 시기였다. 그녀는 Freud를 처음 읽으면서 영감을 얻었고, 그녀의 가족이 그 무렵 정착한 부다페스트에서 Sandor Ferenczi에게 정신분석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따뜻하고 연민의 정이 많은 사람으로, 사람은 본능의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정 결핍으로 신경증을 겪게 된다고 믿고 있었는데, Klein은 그에게 매우 애착하게 됐다. 그는 분석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지지했고, 이것이 그녀가 우울을 극복하게 만든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Ferenczi의 격려에 힘입어 그녀는 미개척 영역이었던 아동 정신분석 분야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필요했지만, 어린 환자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녀의 해결 방법은 자신의 아이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위장하여 사례 연구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당시에는 두문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Freud와 Abraham [독일의 최초 정신분석가 Karl Abraham(1877~1925)을 말함-역주]도 그들의 딸을 분석했다. 또한 Klein 자신이 효과적인 정신 분석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던 자신의 아이들이 분석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Klein은 아동을 치료하는 그녀만의 방식에 착수했고, Freud가 신경증 발달의 핵심으로 보았던 오이디푸스 단계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어린 환자가 보여 준다고 느꼈던 원초적인 불안을 그녀의 동료가 놀라고 당혹해할 정도로 거침없이 직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동료는 정신병적이고 유아적인 공포를 드러내놓고 세밀하게 설명하는 그녀의 접근방식이 아이들을 미치게 만들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이런 가운데 Klein의 결혼생활은 악화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녀의 남편은 스웨덴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녀와 아이들은 베를린으로 갔다. 오랜 자녀 양육권 분쟁 끝에 그녀와 남편은 마침내 1926년에 이혼했다. Klein은 1924년에 Karl Abraham과 분석을 시작했고, Ferenczi처럼 그는 그녀에게 분석가일 뿐만 아니라 멘터가 됐다. Ferenczi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강하게 애착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문 분야에서의 그녀의 고립과 아버지에게 무시당했다는 그녀의 감정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불과 14개월 후에 Abraham이 불치병에 걸리면서 분석이 종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매우 가슴 아파했다.
Klein은 베를린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전의 막막한 우울 상태로 결코 퇴보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받았던 분석의 효과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강력한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돌리는 대신, 요령 없고 직관적이며 화려하고 이채로운 인물로 자신을 드러냈다. 독일 정신 분석가들은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교육을 받았고 의학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이혼이라면 무조건 스캔들이던 시대에 이혼한 경력을 가진 데다, 유대인 계급에서도 낮은 부류에 속했던 폴란드계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훨씬 더 친밀하게 교류했던 그녀의 분석가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어쩌면 이들과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충분히 안전감을 느껴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괴벽성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자신의 고통과 사려 깊음, 창의성의 깊이를 드러냈는지도 모른다.
소규모의 영국 정신분석학계 지주였단 Ernest Jones [영국의 정신분석가로 정신분석 초창기에 Freud 주변에서 함께 모였던 집단에 속했고 정신분석을 영어권 세계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1879~1958)-역주]가 그녀에게 런던으로 이주하라고 강권했던 것은 그녀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작업이 진정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공했고 격려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1927년에 막내아들 Erich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지만, 다른 두 자녀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베를린에 남았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생의 가장 원초적인 층에 대한 Klein의 해석이 놀라울 정도로 번성했는데, 이런 해석은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고 직관에 의존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이런 해석을 급진적인 일련의 새로운 이론적 개념으로 구성했다. 영국 정신분석학계는 두 부류, 즉 그녀의 견해와 분석 방식에 동조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었다(King & Steiner, 1991). 그녀는 같은 방향으로 또 반대 방향으로도 열기를 불러일으켰는데, 전쟁 발발 이전 시기의 불안정함이 이런 열기를 가열시켰다. 점점 더 많은 유태인 분석가가 중유럽에서 영국으로 옮겨 왔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독일이 영국을 침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유태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환상은 없었고, 현금이 부족하고 곧이어 환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은 일거리가 훨씬 더 줄어들었음을 뜻했다.
1938년에 Freud 일가가 영국에 도착했는데, Klein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 일 또한 Jones가 주선한 것이었다. 이들의 도착 이후 이론적인 분열은 급격히 고조됐다. Anna Freud와 그녀의 추종자들은 Klein에 반대하는 싸움에 개인적으로 관여했으며, Anna Freud가 아동 분석에 대한 그녀만의 매우 다른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영국 정신분석학계를 하나로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으로 세 개의 분리된 집단이 구성되었는데, Klein 집단과 비엔나(고전적인 Freud 학파) 집단, 그리고 이 두 집단의 간극을 메우기를 바랐던 독립주의자 집단(The Independents)이 그것이다. 이런 구분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Klein의 개인적인 상실은 계속됐다. 남편과 헤어진 후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에 빠졌던 한 남자는 그들의 관계를 그녀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유부남으로 수많은 혼외관계를 가졌고 Klein과의 관계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1926년에 그녀를 버렸고, 그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에서 그의 배신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Klein과 딸 Melitta의 관계는 출발부터 불안했고 매우 취약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딸이 분석가로 입지를 굳힌 후에 더 악화되었다. 딸과 그녀의 남편 Walter Schmideberg, 그녀의 분석가 Edward Glover는 Klein의 접근방식에 반기를 드는 데 앞장서며, 그녀를 영국 정신분석학회에서 축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Klein 자신은 그들의 공격에 대해 직접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으나 때때로 그들은 너무도 신랄해서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분명히 Klein과 어머니 사이에서 시작됐던 융합과 결핍이 Klein과 딸 사이에서 계속됐고, 그것이 밑바닥까지 드러나 그 이면에 있던 증오와 질투심을 세상이 목격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이것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던 불화였다. Melitta는 어머니 장례식에 불참했고 조문 편지에도 답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남동생이 보낸 조문 편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Klein은 맏아들 Hans마저 잃었다. 그는 1934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등반 사고로 죽었는데, Melitta는 그가 자살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을 분명히 전했다. 그녀의 막내아들인 Eric만이 유일하게 그녀 곁에 남았고, 그녀가 말년에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그의 자녀들이었다. 1939년 전 남편 Arthur의 죽음과 1940년 그녀가 선망했던 언니 Emilie의 죽음은 그녀에게 상실의 아픔을 더했다.
이렇게 Klein은 삶의 대부분을 계속되는 애도 상태에서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구성하는 생애 초기의 상실과 죄책감, 외로움, 시기심, 박해를 세밀하게 연구하는데 자신의 고통을 활용했다. Hans의 죽음에 이은 그녀의 고뇌와 방향감각 상실에 대해 그녀는 자신을 ‘A 부인’으로 위장하고 묘사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통렬하다(Klein, 1940). 그녀는 인정을 얻고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이론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안해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에게는 숭배의 대상이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어느 누구와도 친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죽기 전 병원에서 보낸 마지막 몇 주 동안 바로 옆 병실에 있던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했다. 아마도 이 반응이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집약해 주는 듯하다. 그녀는 1960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성인을 대하는 요령이 부족하고 적대적이어서 사람들에게 경외심이나 두려움 혹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을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보기보다 잠재적인 우군이나 적으로 취급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고통받는 아이들과 가장 가깝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그녀의 어린 환자는 애정을 갖고 그녀를 기억한다. 반면에 그녀의 동료 대부분은 감탄하는 마음이나 혐오감을 갖고 그녀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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