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대상관계이론 입문(프로이트의 이론 / 마음의 구조, 본능) - 저자 Lavinia Gomez

율미로그 2025. 8. 22. 13:52

마음의 구조
Freud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마음의 구조를 “자아와 원초아(the Ego and the Id)”(Freud, 1923)에서 처음으로 제안했다. 후기작인 『정신분석 개요(Outline of Psychoanalysis)』(Freud, 1938)에서 그는 이런 구조가 뇌라는 신체 기관과 의식이라는 주관적인 경험 사이의 연결 고리라고 가정했다.
Freud는 원초아를 마음의 원시적이고 불변하는 기반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직접적으로 경험되기보다 언제나 추론되는 것이다. 그는 원초아를 본능이나 욕동(Triebe)이 들끓는 가마솥으로 묘사한다. 원초아의 목적이 인간의 근원적인 목적이고, 그것은 생각이나 타협 혹은 조건이 없는 욕구 충족이다. Freud는 괴벽스러운 정신과 의사 Georg Groddeck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가져왔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인간은 미지의 어떤 것에 의해 활기를 얻고, 인간 내면에는 ‘그것’ (‘Es’ 혹은 ‘it’),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과 그에게 일어나는 것 모두를 지배하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존재한다. … 인간은 바로 ‘그것’으로 살아간다(Groddeck, 1949: 11).

원초아와 그 안의 욕동 모두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것은 다른 동물이 둥지를 짓거나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처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심리 생리학적 특성이며, 정신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사이의 경계선상에 존재한다.
자아는 ‘나(I)’라는 용어의 단순성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상상에 의해 창조된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마음의 조직화된 부분이다. 자아의 기능은 이것이 그 일부를 이루는 전체 유기체를 보존하고, 또한 원초아와는 차별화된 부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Freud 사상에서 자아의 기원은 불명확하다. 그는 동일한 논문에서 한 편으로는 자아가 처음부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출생 이후 원초아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묘사한다(Freud, 1938). 분명한 것은 Freud는 자아를 비교적 연약한 구조로 보았다는 점이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어지면 자아는 기반을 상실하고,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없게 되며, 초자아에 의해 어느 정도 약화될 수 있고, 원초아에 의해 잠식되거나 재흡수될 수 있다.
자아의 일차적 기능이 자기 보존이기 때문에 외부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원초아가 생존 및 안녕과 일관되게 최대한의 만족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자아는 인간이 원하는 바를 다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원초아의 요구와 외부 현실의 제약 및 초자아의 압력을 중재한다. 이것은 타협이나 욕구 충족의 지연 및 거부에 의해 작동하며,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생각을 하게 한다. 원초아의 충동은 굴러가는 축구공을 쫓아 곧장 길로 뛰어들도록 우리를 내몰겠지만, 자아는 우리로 하여금 차가 먼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게 한다.
초자아는 마지막으로 발달하며, 또한 가장 명확한 사회적 산물이다. 비록 우리는 이것에서 파생되는 죄책감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는 하지만, 초자아는 원초아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무의식적이다. 초자아는 부모의 금지하는 목소리, 전형적으로는 아버지를 내면화한 것이다. 이런 구현(具現)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결된 것의 일부인데, 여기에서 부모의 목소리는 내적 통제 능력을 변형된다. Freud는 초자아에 상응하는 좀 더 긍정적인 측면인 자아 이상(the ego-ideal)에 대해서는 훨씬 덜 언급한다. 그는 자아 이상을 좀 더 부드러운 부모의 목소리, 전형적으로 어머니의 내면화로 본다. 초자아는 죄책감에 의해 지지받는 자기 절제의 형태로 부정적인 통제를 제공한다. 자아 이상은 우리가 갈망할 수 있는 이상을 제공한다.
자아의 임무는 원초에서 나오는 요구와 초자아 및 외부 현실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면 불안이 발생한다. 만약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외부 세계에서 오면 현실적인 불안이 발생한다. 초자아의 욕구가 무시되면 도덕적 불안이나 죄책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만약 원초아의 욕구가 충분히 인식되지 않으면, 신경증적 불안 혹은 신경증적 증상이 발생한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자아를 강화하고, 초자아가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특별히 약한 경우에는 초자아를 조절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는 어떤 개인이든 지엽적으로만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며, 원초아는 변화시킬 수 없다. 원초아의 힘은 관리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정신분석이 할 수 있는 것은 갈등을 참아 내고 불안을 담아내며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자아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뿐이다. Freud가 다음의 정신분석의 목표를 서술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원초아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있게 된다.” (Freud, 1933)

 

본능
원초아와 자아, 초자아라는 요소가 마음의 구조를 이루는 반면에 본능 혹은 욕동은 마음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욕동에 대한 Freud의 시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바뀌었으나 그는 항상 이것을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군으로 분류했다. 처음에는 욕동을 개인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진 배고픔과 공격성 같은 자아 본능(ego-instincts) 그리고 종족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성적 본능(sexual instincts)으로 규정했다(Freud, 1914).
이후 그는 본능의 군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를 에로스, 즉 리비도라 불리는 에너지를 가진 삶의 본능과 흔히 하나의 죽음 본능으로, 때로는 타나토스라 불리는 죽음의 본능으로 바꾸었다(Freud, 1920). 원초아 속에 존재하는 본능은 모든 정신생활의 힘이다. 이들은 매우 생물학적인 비유이며, Freud에 따르면 마음의 토대를 이루는 삶의 물리적인 요소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본능은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Freud는 그가 삶이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여긴 출생의 순간부터 본능이 지속적인 융합 상태에 있는 것으로 상상했다.
죽음 본능의 힘은 현재 상태의 해체를 지향하며 퇴행을 통해 이전의 존재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 이전에 우세했던 상태, 즉 죽음으로 대표되는 생명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본능 단독으로는 개인이 평화롭게 생명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Freud는 생명의 이런 내적 파괴자는 우리 기질의 일부로서 늘 우리와 함께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죽음 본능을 외현화하여 다른 존재나 혹은 존재의 다른 상태를 해체하고 파괴하려는 충동을 만들어 내야만 죽음을 향한 우리의 욕동에 맞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본능은 마침내 해소 상태로 들어가 죽음의 본능은 하나의 내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자연적 죽음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를 초래한다.
에로스는 죽음 본능의 외현화 이면에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Freud 이론에서 개인이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은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많은 면에서 죽음 본능과 동등하면서 대립하는 힘이다. 하지만 또한 이런 주장과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게, Freud는 생명이 없는 상태가 항상 생명이 있는 상태를 이기기 때문에 죽음 본능이 우세한 것이 분명하다고 암시한다. 죽음 본능은 해체를 지향하는 반면, 에로스는 새로운 합일을 만들기 위해 사물을 결합하는 욕동이다. 에로스는 성욕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Freud는 성욕을 생산의 목적을 위해 두 존재를 하나로 합치는 힘으로 본다.
그러나 Freud가 본능이 융합되어 있다고 여긴 것처럼, 실제로 성욕은 어느 정도의 죽음 본능을 포함하고 있다. Freud는 자신의 남성적, 이성애적 관점에서 성적 행위를 가장 깊은 친밀감을 주려는 목적의 공격성의 행위, 즉 삽입으로 묘사한다. 성적이든 성적이지 않든 모든 충동에는 비슷한 뒤섞임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사과를 먹는 행위도 사과를 원하는 욕구와 궁극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로 동기화되는 동시에, 하나의 분리된 실체로서 사과를 파괴하고자 하는 욕구로 동기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Freud 이론의 융합된 욕동은 창조적인 욕구와 파괴적인 욕구를 포함하며, 어떤 충동도 이런 욕구로 환원해서 분석할 수 있다.
죽음 본능은 Freud가 살았던 시대에서조차 논란을 불러일으킨 생각이었고, 흔히 반(反) 생물학적이고 특이하게 비관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이중성의 저변에 합일성이 존재해야 하고 존재의 근원에는 삶의 본능만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공격성은 때로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인 힘으로, 혹은 좌절에 대한 반응으로서 일차적이기보다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죽음 본능(혹은 이 점에서는 어떤 ‘본능’이든 간에)이라는 개념이 명백한 부정적 행위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 행위가 단순히 ‘본능’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Freud가 겪은 삶의 경험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파괴성이 하나의 주요한 힘이라는 그의 확신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는 예전에 확실했던 것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괴되는 해체 과정을 겪고 있는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914년과 1918년 사이에 일어났던 ‘대전쟁’ 혹은 ‘세계대전’은 오늘날 핵전쟁만큼 파괴적이었음이 분명하며, 자기 자신과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암울한 증거였다. Freud의 말년에, 그의 생애에 걸쳐 점점 더 악성적으로 커져 온 반유대주의는 그의 민족을 파멸시키려는 시도와 그의 일생의 연구를 금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39년 사망할 때까지는 그는 16년 동안 점차 암의 증세가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죽기 몇 주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Freud가 죽음 본능을 에로스와 균형을 맞추었다는 것은 오히려 낙관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죽음 본능은 오늘날 종종 시대착오적인 개념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것을 무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본능 간의 갈등에 대한 Freud의 관점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이해 및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단순하며 좀 더 친숙한 과거의 방식으로 퇴행하는 것, 즉 비활동의 당기는 힘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고투하는 어려움으로 이 갈등을 바꾸어 표현해 보는 것이다.
비록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죽음 본능과 같은 개념의 가능성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둠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내면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파괴성의 깊이를 인정하게 된다. 비록 죽음 본능이 불러일으키는 전쟁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해도,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일시적인 휴전을 얻어 낼 수 있을 뿐이다. 죽음 본능은 개인의 죽음과 종의 멸종, 심지어 우리가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소금 끼치는 사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태로서 우주의 필연적인 종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죽음은 우리에게 몰래 다가와 우리의 생명을 앗아 가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을 향한 움직임은 우리 안에 존재하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죽는 것과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수용할 수 있는 사태로서 삶과 나란히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인간성의 가장 사악한 특성을 교묘한 설명으로 내치는 감상적인 인간관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