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심리학의 오해 10판(난쟁이 관리인) - 저자 키이스 스타노비치

율미로그 2025. 9. 7. 11:26

반증 불가능한 개념화는 우리가 주제로부터 초연해질 때, 특히 (벤저민 러쉬의 예에서처럼) 역사를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때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또한 반증 불가능한 개념화는 사례가 명백하게 꾸며진 것일 때 쉽게 탐지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행동을 통제하는 두뇌의 기저 기제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분들은 머지않아서 이 발견에 관한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동네 슈퍼마켓 문 앞에 널려 있는 생활 안내지에서 말이다). 두뇌 좌측 반구에는 언어영역 가까이에 두 명의 난쟁이 관리인이 살고 있다. 이들은 두뇌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기화학적 과정들은 제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은 기본적으로 두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제어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관리인들은 두뇌의 어떤 침투(외과적 수술, X선 등)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침투를 탐지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들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확실히 초등학생에게나 적합할 만한 예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지능을 모독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음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심리학 교수로 그리고 심리학 주제에 관한 대중 강연자로서 나는 왜 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초감각지각(extrasensory perception : ESP)과 사이비심리학(parapsychology)에서의 놀랍고도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 강의하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 주제에 관해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원천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대중매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몇몇 과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주목하였지만, 결과를 반복해서 얻어낼 수 없었다. 나는 청중들에게 하나의 입증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려면 결과의 반복 검증이 필수적이며, 특히 이전의 데이터나 확립된 이론과 상반되는 결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많은 과학자들이 ESP 연구에 분통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언급해 준다. 한 가지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이 분야가 사기, 야바위 행위, 그리고 대중매체의 상업적 이용 때문이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런 미망(迷妄)에서 깨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 1972)가 오래전에 ESP 연구의 Catch-22)라고 명명한 것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한 “신봉자”(연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ESP 현상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람)가 실험실에서 ESP를 증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현상을 확증해 보기 위해서 한 “회의론자”(ESP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를 불러들인다. 회의론자는 흔히 실험 상황을 관찰한 후에보다 많은 실험통제(제6장에서 논의할 유형의 통제)를 가할 것을 요구한다. 때로는 이러한 요구가 묵살되기도 하지만, 선의의 신봉자는 그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통제를 가하게 되면 그 현상을 시범 보일 수 없게 된다. 회의론자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원래의 증명은 부적절한 실험통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해석하지만, 통제 상황에서 현상을 시범 보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봉자는 원래의 증명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신봉자는 ESP의 Catch-22를 들먹인다. 즉, 염력은 미묘하고 민감하며 쉽게 와해된다고 주장한다. 회의론자의 “부정적인 마음의 동요”가 “염력”의 와해에 책임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염력은 회의론자의 부정적 기운이 제거될 때 회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험에서 ESP의 증명 실패를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난쟁이 관리인에 관한 나의 이야기에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ESP는 난쟁이 관리인이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작동한다. ESP는 여러분이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위해서 침입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만 존재한다. 여러분이 침입하면 이것은 사라지고 만다. 만일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회의적 관찰자에게서도 이 현상을 증명할 수 없다. ESP는 단지 신봉자에게만 나타난다. 이것이 과학에서 용인될 수 없음을 말할 것도 없다. 자성(磁性) 물리학자와 비자성 물리학자(자성이 작동하는 물리학자와 작동하지 않는 물리학자)가 있을 수 없다. ESP 실험을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난쟁이 관리인 가설이 반증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ESP 가설을 반증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과를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결과를 과학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모든 확증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반증 가능성 원리는 한 이론의 확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과학 이론이란 계속해서 확증되어 온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반적으로 한 이론의 평가에서 결정적인 것은 단순히 확증 증거의 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증 가능성의 생각은 한 이론이 확증되었던 횟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노크리듬 이론”이라고 꾸며낸 사례가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확증이 등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증의 비중은 예언 자체가 잠재적인 반증에 노출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매우 상세하여 잠재적으로 반증 가능성이 높은 예언(예컨대, 여자이고 나이가 30세이며, 키는 160cm이고, 책과 지갑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노크를 한다)의 확증은 현실적으로 반증 불가능한 20개 예언(예컨대, 100세가 넘지 않은 사람이다)의 확증보다도 큰 비중을 갖는다.
따라서 확증 증거의 양(quantity)뿐만 아니라 확증 사례의 질(quality)도 따져보아야만 한다. 증거 평가를 위한 도구로서 반증 가능성 기준을 채택하는 것이야말로 연구 결과의 소비자들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본질과 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탐색을 방해하는 비과학적이고 만병통치적인 엉터리 이론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제로 그렇게 이론적으로 막다른 골목은 결코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흔히 유혹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현대세계라고 하는 거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안정된 섬과 같은 것이다.
포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주 지적하여 왔다.

이러한 이론들이 상당한 심리적 호소력을 갖게 되는 비밀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다는 것은 지적 성숙감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세상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고 있다는 정서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감의 획득이 과학의 목적은 아니다. 지적 안정감이라는 보상은 지적 정체감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과거에 가졌던 신념이 틀린 것임을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경험적 검증을 받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그 신념에 도전하여 깨뜨리는 기제인 것이다. 과학의 이러한 특성이 제1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소위 민속 지혜나 상식과 갈등을 일으키게 만들며, 특히 심리학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