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심리학의 오해 10판(심리학과 민속지혜) - 저자 키이스 스타노비치

율미로그 2025. 9. 1. 14:18

심리학과 민속 지혜 : “상식”의 문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 관한 생각 그리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행동에 대한 암묵적 모형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여러 사회심리학자, 성격심리학자, 그리고 인지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암묵적 심리 이론들의 본직을 연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 이론의 내용을 명백하고 논리적인 형태로 진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이론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거나 아니면 그 이론이 어떤 면에서 심각하게 도전받을 때라야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행동에 관한 사람들의 개인 모형은 진정한 이론이 갖추어야만 하는 방식으로 응집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끄집어내게 되는 인간 행동에 대한 일반 원리나 훈계 또는 상투적인 말 등을 담고 있는 잡동사니 가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 행동에 대한 이러한 상식적 지식의 문제점은 대부분이 자체적으로 상호 모순적이라서 반증 불가능 하다는 데 있다(반증 가능성의 원리가 다음 장의 주제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의 행동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거에 그와 동일한 유형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써먹었던 속담과는 상반되는 상투적 표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하기 전에 잘 살펴라.”(Look before you leap)를 말하거나 들어왔다. 여기에는 내가 때때로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훈계성 속담을 예외로 한다면, 유용하고도 직접적인 충고가 들어 있다 : “주저하는 자는 잃는다” (He who hesitates is lost). “헤어지면 더욱 그리워진다”(Absence makes the heart grow fonder)는 환경에 대한 정서 반응을 꽤나 잘 예측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안 만나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서두르면 일을 그르친다”(Haste makes waste)라면, 어째서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Time wait for no man)라고 충고한단 말인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Too many cooks spoil the broth)라는 예외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Two heads are better than one)는 속담이 거짓일 수 있겠는가? 만일 “불쌍해지는 것보다는 안전한 것이 낫다”(It’s better to be safe than sorry)라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라고도 믿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양극은 당긴다”(Opposites attract)라면, 어째서 “유유상종”(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이란 말인가? 나는 많은 학생들에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Never put off until tomorrow what you can do today)라고 충고하여 왔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충고를 해주었던 학생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그 학생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일이 닥치기도 전에 걱정하지 말아라.”(Cross the bridge when you come to it)라고 충고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부한 상투적 표현들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호소력은 행동에 대한 암묵적 “설명”으로 함께 묶임으로써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든지 간에 이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데 인용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 행동과 성격에 대한 우수한 판단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모든 사건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민속 지혜는 부정될 위험에 결코 노출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겁한 것이다.
사회학자 던칸 와츠(Duncan Watts, 2011)가 자신의 저서에 『모든 것은 자명하다-일단 답을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Everything is Obvious-Once You Know the Answer)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바로 민속 지혜는 “사후 약방문식” 지혜라는 사실 그리고 진정한 예언력이라는 의미에서 쓸모가 없다는 사실이다. 와츠는 사회학자 라자르스펠트(Paul Lazarsfeld, 1949)의 고전적 논문을 논의하고 있는데, 그는 이미 60여 년 전에 “사회과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다”는 진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라자르스펠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던 600,000명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대규모 조사에서 얻은 일련의 결과를 제시하였다. 예컨대, 농촌 출신이 도시 출신보다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 우수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였다는 것 등이다. 사람들은 이 조사의 모든 결과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이 사례에서 사람들은 농촌 출신들이 거친 자연환경에 익숙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군대 생활 여건에 보다 잘 적응하였을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 결과들도 지극히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라자르스펠트가 일격을 날리고 있다. 모든 결과는 애초에 진술한 것과는 정반대라고 천명한 것이다. 예컨대, 실제로는 도시 출신이 농촌 출신보다 복무하는 동안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제공하는 결정적인 교훈은 사람들이 정반대 되는 결과도 얼마나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깨닫는 것이다. 만일 실제 결과를 먼저 들었더라면 사람들은 도시 출신들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비좁은 조건에서 그리고 위계적 권위 하에서 일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설명해 버리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정반대 되는 결과에 대한 설명을 얼마나 쉽게 궁리해 낼 수 있는 것인지를 결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심리이론은 부정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음 장에서 부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이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이유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민속 신념이 어떤 구체성을 띠고 있어서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할 때 일어난다. 문제는 심리학 연구들이 행동에 관한 많은 문화적 신념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해 보면 엉터리로 판명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엉터리 민속 신념(또는 “상식”)의 사례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공부를 잘하거나 독서를 많이 하는 아동이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미숙하다는 생각을 보자. 이 생각은 전혀 맞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 계속해서 통용되고 있다. “상식적” 민속 신념과는 정반대로 독서를 많이 하고 학구적인 사람들이 독서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신체적으로도 튼튼하고 사회적 관계도 원만하다는 엄청난 양의 증거들이 있다(Zill & Winglee, 1990). 예컨대,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열등한 아이들에 비해 또래들로부터 인정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운동을 하거나 조깅을 하거나 캠핑을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자동차 수리를 즐길 가능성이 더 높다.
행동에 관한 많은 민속 신념이 스스로 생겨나서는 자생하고 있다. 예컨대, 1990년대에 걸쳐서 우리 사회와 학교에서는 낮은 자존심이 공격성의 원인이라는 민속 신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경험적 연구들은 공격성과 낮은 자존심 사이에 아무런 연계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왔다. 만약 있다면, 정반대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즉, 공격성은 높은 자존심과 보다 자주 연합되었다. 마찬가지로 지난 20년에 걸쳐 한 가지 극단적인 대중적 가설은 학업성취의 문제가 낮은 자기 존중감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자기 존중감과 학업성취 간의 관계는 교육자와 부모가 가정한 것과는 그 방향이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높은 자기 존중감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학교에서의(그리고 삶의 다른 측면에서도) 우수한 성취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민속 지혜의 또 다른 상식적 표현인 “자녀가 부모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를 생각해 보자. 만일 이 진술을 은퇴라는 관점에서 자녀의 효과를 바라다보는 방식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정도 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녀가 자신들에게 상당한 행복을 가져다준 것으로 회상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한 사건을 회상하는 관점을 그 사건의 실제 경험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갖게 된 것을 노년에 회상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현재진행 중인 순간순간의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자녀는 실제로 사람들을 덜 행복하게 만든다. 오늘날 사람들이 다양한 시점에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살펴보는 소위 경험 표집 기법(experience-sampling method)을 사용한 상당한 문헌들이 존재하며, 이 연구들을 보면 예컨대, 결혼이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의 행복은 맏이의 출생과 함께 감소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행복은 맏이가 청소년기에 도달할 때까지 약간 반등한 다음에 더 아래로 떨어진다. 부부의 행복은 막내가 집을 떠날 때에야 비로소 자녀가 없던 수준으로 되돌아간다.
요컨대, “자녀가 부모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민속 지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상당히 복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회고적 견지에서만 참이다. 즉, 자녀가 마침내 분가를 하고 그들을 키워냈다는 성취감을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녀는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진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것이 아니다. 자녀를 갖는 것은 바로 이 순간, 지극히 가까운 미래에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 십상이다. “민속 지혜”가 어처구니없게도 엉터리로 판명된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민속 지혜가 엉터리로 판명된 또 다른 사례가 선다형 시험문제에서 이미 선택한 답에 대해서 확신이 없을 때 답을 수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학생들에게 주는 상식적 충고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답을 확신할 수 없을 때 답을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바론의 GRE 자습서(Barron’s Guide to GRE)는 “답을 바꾸고자 결정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경험에 따르면 답을 바꾼 많은 학생들이 정답을 오답으로 바꾼다”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 충고는 명명백백하게 엉터리이다. 이 충고가 엉터리인 까닭은 답을 고치는 것이 점수를 떨어뜨린다는 민속 신화가 완전히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 연구는 선다형 문제의 답에 의심이 들 때 처음의 답을 수정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왔다.
민속 지혜가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는 사람들이 두뇌 능력의 10%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민속 신화에 들어있다. 인지신경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신념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정신적 사실”(psycho-fact), 즉 진실이 아님에도 끊임없이 반복됨으로써 일반인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진술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좌뇌형”이고 다른 사람은 “우뇌형”이라는 신념이나 성격의 특정 측면은 두뇌 좌반구가 제어하며 다른 측면은 우반구가 제어한다는 신념도 마찬가지다. 현대 신경과학 연구가 두뇌 전반에 걸쳐서 미묘한 좌우반구 전문화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좌뇌형”이나 “우뇌형”이라는 이름으로 이 아이디어가 상당히 대중화된 것은 필연적으로 난센스이다. 특히 우리의 두뇌는 통합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결과에 비추어볼 때 그렇다.
민속 신념이 항상 증거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상반된 증거가 널리 알려지게 됨에 따라서 변하기도 한다. 예컨대, 수년 전까지 아동에 대해서 널리 통용되던 상투적 표현 중의 하나가 “빨리 익으면 빨리 썩는다”(Early ripe, early rot)이었다. 이 상투적 표현은 아동기의 조숙이 성인기의 비정상과 관계있다는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며, 신동(神童)이었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영락하고 말았다는 많은 일화를 먹고사는 신념이었다. 이 경우에는 민속 신념이 엉터리임을 증명하는 심리학 증거를 대중문화가 받아들였으며, 이제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민속 지혜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위의 마지막 예는 오늘날 통용되는 “상식”에도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몰상식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상식이란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여성이 투표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런가? 모든 사람은 미국 흑인에게 읽기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런가? 모든 사람은 장애자는 사회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도록 수용기관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런가? 실제로 15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모든 신념은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었다. 물론 이제는 과거의 이런 상식이 검증받지 않은 가정에 근거한 신념으로써 몰상식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우리는 심리학이 상식에 대항해서 수행하는 역할을 알 수 있다. 심리학은 상식이 근거를 두고 있는 가정(假定)들의 경험적 기반을 검증한다. 앞의 많은 예들을 통해서 보았던 것처럼, 그 가정들을 검증해 보면 엉터리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논의하였던 예들로부터 그리고 필요하다면 인용할 수 있는 더 많은 예들로부터 많은 민속 지혜에 대한 경험적 검증자로서 심리학의 역할이 현재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많은 문화적 신념들과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리학은 안락함을 제공하는 민속 신념이 더 이상 안락한 것이 아니라는 “달갑지 않은 소식”의 전달자이기 십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메시지 전달자와도 멀리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