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합리적 정서행동치료(REBT): 비합리적 신념을 다루는 지혜

율미로그 2025. 10. 2. 07:10

 

우리는 종종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고,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면 하루 종일 불행한 기분에 잠기기도 하죠. 이런 감정은 마치 외부 사건이 직접 원인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해석’과 ‘신념’**이 감정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심리치료 이론이 바로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가 창안한 **합리적 정서행동치료(REBT: 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입니다. 권석만 교수의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에서도 이 치료가 인지행동치료의 중요한 한 축으로 설명되는데, 저는 이 내용을 제 삶의 경험과 함께 재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1. 감정은 사건이 아니라 ‘생각’에서 비롯된다

엘리스는 우리가 불안, 분노, 우울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는 이유를 “비합리적 신념(irrational beliefs)”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유명한 ABC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 A(Activating event): 어떤 사건이나 상황
  • B(Belief):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 해석
  • C(Consequence): 결과로 나타나는 감정과 행동

많은 사람들은 A가 곧바로 C를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으니 당연히 우울하다, 연인에게 차였으니 당연히 절망스럽다라고 믿는 식이죠. 그러나 엘리스는 A와 C 사이에 반드시 B가 개입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신념을 갖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정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 비합리적 신념의 특징

엘리스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비합리적 신념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했습니다.

  1. 당위적 사고(Must/Should Thinking)
    • “나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런 과도한 요구는 현실과 맞지 않아 좌절과 분노를 낳습니다.
  2. 파국화(Catastrophizing)
    • “한 번의 실패는 내 인생의 끝이다.”
    • “이 일이 잘못되면 모든 게 망한다.”
      실제 상황보다 훨씬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입니다.
  3. 자기 혹은 타인 비하(Global Rating of Self/Others)
    •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 “저 사람은 전혀 믿을 수 없다.”
      한두 가지 행동을 전체 존재 가치와 동일시하는 오류입니다.

저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 자주 빠졌습니다. 대학 시절 발표를 망쳤을 때, ‘나는 발표에 소질이 없으니 앞으로도 늘 실패할 거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저 자신을 전면 부정했던 것이죠. 결국 발표가 다가올 때마다 불안이 커졌고, 오히려 더 긴장하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3. 비합리적 신념에 도전하기

REBT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비합리적 신념을 찾아내어 그것을 논박하고,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신념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를 ABCDE 모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A: 사건
  • B: 신념
  • C: 결과(감정·행동)
  • D(Disputation): 비합리적 신념에 대한 논박
  • E(Effect): 새로운 신념으로 인한 효과

예를 들어,

  • A: 직장에서 상사가 내 보고서를 수정함.
  • B: “상사가 날 무능하게 생각하는 거야. 난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지.”
  • C: 낙담, 분노, 무기력
  • D: “정말 그 한 번의 지적이 내 전체 능력을 의미할까? 상사는 단지 더 나은 결과를 원했을 뿐 아닐까?”
  • E: “나는 성장 중인 사람이고, 수정은 발전의 기회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감정의 파도는 조금씩 잔잔해지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깁니다.


4. 내 삶에서의 적용 사례

저는 REBT를 알게 된 후, 인간관계에서 특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면 곧바로 ‘내가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서운함과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REBT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이는 제 안의 **“모든 사람은 나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D 단계를 적용했습니다.

  • “정말로 친구가 날 무시하는 걸까?”
  • “그 친구도 사정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 “내 가치가 약속 취소 하나로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신념을 조정하니,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이 줄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5. 현대 생활에서의 활용 가능성

합리적 정서행동치료는 단순한 상담 기법을 넘어, 일상 속 사고 습관을 점검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 직장인이라면 업무 스트레스 속에서 ‘반드시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을 완화할 수 있고,
  • 학생이라면 시험 결과에 따른 자기 가치 평가를 보다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 부모라면 ‘아이들은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내려놓고, 더 유연한 양육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REBT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이 힘은 단순히 감정을 조절하는 차원을 넘어, 삶을 훨씬 더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6. 맺음말

합리적 정서행동치료는 ‘감정을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왜곡된 사고를 발견하며, 그것을 합리적인 시각으로 교정하도록 이끕니다. 마치 안경의 렌즈를 바꾸면 세상이 선명해지듯, 신념을 교정하면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저는 여전히 감정 기복이 심할 때가 많지만, 예전처럼 무조건 휩쓸리지는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정말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REBT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