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판 이론
형판 이론은 형태에 대한 기록을 가정하지 않는다. 형판(template)이란 분석되지 않은 개체로서, 두 개의 형태를 비교한다는 것은 각 형태에 상응하는 두 개의 형판이 겹치는 정도를 측정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두꺼운 종이를 오려서 한 세트의 문자는 만들어 두었다고 상상해 보라. 만약 내가 만든 문자 하나를 주면, 여러분은 내가 준 것과 여러분이 만들어 두었던 문자-형판-를 하나씩 맞추어보며 서로가 겹치는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든 형판 중에서 내가 준 것과 가장 많이 겹치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여러분은 내가 준 형태가 무슨 문자인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제, 종이로 만든 문자를 각각의 문자에 의해 망막에 투사된 시각 상(visual images)이라고 생각하고, 이 시각 상들이 형태 인식에 필요한 비교 과정에 이용된다고 생각해 보라. 이때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것이다.
형태 인식 방법으로 자극 형태와 기억 속의 형판이 겹치는 정도를 이용한다는 이 아이디어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이 비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판의 위치, 정위(orientation) 및 크기가 자극형태의 위치, 정위 및 크기와 일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극형태의 위치, 정위 및 크기에 따라 기억 속 형판의 위치, 정위 및 크기를 끊임없이 조절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두 번째 문제는 그림 2.1이 보여주는 것처럼, 특정 대상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문자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 각각의 형태에 맞는 형판이 기억 속에 구비되어 있어야만 형태 인식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 형판 이론은 두 형태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형판 이론에 의하면, 대문자 P와 R은 서로 겹치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비슷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두 낱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 낱자들을 분석하거나 묘사해 봐야 한다. 그런데 형판 이론은 이런 분석이나 묘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형판 이론의 네 번째 문제는 하나의 형태에 대한 두 가지 묘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림 2.5의 형태는 선분이 어떻게 조직되느냐에 따라 ‘가오리’로 지각되기도 하고 ‘돛’으로 지각되기도 한다. 나중에 소개되는 구조 이론에서는 한 형태를 구성하는 부분들 간의 관계를 명시하도록 한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형판 이론이 일반적인 형태 인식 이론일 가능성은 매우 낮고, 따라서 대개는 가볍게 취급하고 만다. 그러나 형판 이론이 유용한 경우도 있다. 제1장에서 감각기억(sensory store)은 형태 인식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감각정보를 잠시 동안만 보관한다고 말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면 감각자극은 감각기억에 어떻게 보관되는 것일까? 한 가지 가능성은 자극의 형태가 감각기억에 분석되지 않은 형판으로 저장되었다가, 형태 인식 단계에서 속성들로 분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감각기억에 대한 이 같은 해석을 가장 분명히 제시한 사람은 Phillips(1974)였다. Phillips는 사각형 행렬판의 여러 칸을 무선적으로 메워서 만들어진 형태를 피험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첫 번째 형태를 1초간 보여준 후 다양한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째 형태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제시된 형태는 첫 번째 제시된 형태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이었다. 피험자의 과제는 이 두 형태가 같은지 다른지를 신속히 결정하는 것이었다. 절반의 시행에서는 첫 번째 형태가 제시되었던 바로 그곳에 두 번째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 경우 두 번째 형태가 첫 번째 형태의 감각 상(sensory image)과 정확히 겹치게 되기 때문에, 감각기억 속 정보가 형판 맞추기에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시행에서는 두 번째 형태가 첫 번째 형태가 제시된 위치에서 한 칸 옆으로 비켜 제시되었다. 이 위치변동 때문에 두 형태는 겹쳐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형판 맞추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림 2.2는 Phillips의 실험 결과를 보여준다. 자극간 간격(interstimulus interval)-첫 번째 형태가 사라진 순간부터 두 번째 형태가 제시된 순간까지의 시간 간격-은 20, 60, 100, 300, 혹은 600msec(1msec=1/1000초)였다. 두 개의 형태가 동일한 위치에 제시된 조건에서는 (그림 2.2에서 ‘고정’) 자극간 간격이 길어짐에 따라 정확성이 감소하였다. 이 결과는 피험자들이 빠르게 소멸되는 감각기억을 활용했음을 암시한다. 두 번째 형태의 위치가 변동된 조건에서는 형판 맞추기에 감각기억을 이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자극간 간격이 변해도 정확성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감각기억의 활용으로 정확성이 향상된 조건들의 자극간 간격은 300msec 이하였음을 주목하라. 이는 감각기억이 약 1/4초밖에 유지 되지 않는다는 암시이다. 자극간 간격이 20msec 이하이고 두 형태가 동일한 위치에 제시되었을 때는 형태가 복잡한 조건에서조차 정확성이 거의 완벽하였다.
두 번째 형태의 위치가 변동되었을 때는 첫 번째 형태의 감각 상(sensory image)이 아니라 그 형태에 대한 기록이 형태 인식 과정에 이용된다. 이 기록의 모양이 시간 상(visual image)의 모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의 형태와 같은 감각 상과는 달리, 이 시각 상은 기억에서 인출해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감각 상보다 덜 정확할 수밖에 없다. 또한 두 개의 형태에 관한 기록을 비교하는 데는 형판을 맞추어보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고정’ 조건보다 ‘변동’ 조건에서의 반응시간이 길어져야 한다. 실제로, ‘고정’ 조건에서의 반응시간은 매우 짧았으나 자극간 간격이 길어짐에 따라(아마 감각 상을 비교에 이용하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반응 시간도 길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변동’ 조건에서는 반응시간이 길었으며, 자극간 간격이 길어져도 반응시간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성과 반응시간에 관한 이러한 결과는 두 자극형태가 동일한 위치에 제시되고 자극간 간격이 300msec 이하인 경우에는 형판 맞추기에 감각기억이 활용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